라면과 쇼팽 사이에서 울고웃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라면과 쇼팽 사이에서 울고웃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 이현 영화해설가
  • 승인 2018.01.31 15: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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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영화로는 맛볼 수 없는 한국 영화만의 즐거움이 녹아나...
영화 '그것만이 내세상' 포스터.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포스터. = CJ 엔터테인먼트

[휴먼에이드] 신선하지 않다. <국제시장> 등 수많은 상업영화를 제작한 야무진 제작사, JK 픽처스 작품이라는 것,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이 많다는 투자배급사, 씨제이 엔터테인먼트 작품이라는 것, 한물간 복서의 비루한 캐릭터를 코믹하게 그리고, 그에게 핸디캡과 동시에 기회가 될 수 있는 서번트 증후군의 동생이 피아노에 천부적 소질이 있다는 것도, 어릴 때 나를 버리고 동생을 택한 후 17년 동안 안 보고 산 엄마라는 등등의 설정이……

심지어, 이병헌, 박정민, 윤여정, 김성령 등 인지도 높은 배우진들까지.

그냥 공식대로 툭툭 치고 나가는 스토리이지 않겠나. 이러한 전형성을 가지고 무엇을 추구하고 무얼 성취한 작품일까. 영화는 결코 깊고 심오하고 철학적이지 않다. 그러나, 객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머리를 비우고 가슴으로 보도록 하자는 의도한 목적을 달성한다.  
 
당신은 맷집 뒤에 무얼 숨겼나?

우리 마음 속에는 나이만큼의 '나'가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만약, 열 네살의 '외롭고 아픈 나'를 '지금의 나'가 잘 보듬어 주지 않으면, 위기의 순간이 찾아올 때 '어리고 상처받은 나'가 현재의 삶 속으로 튀어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의 삶이든 결핍이 있게 마련이고 '비타민 결핍'처럼 약국에서 사온 재료로 몸을 채우면 간단히 해결되는 결핍증이란 없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조하 (이병헌)와 동생 진태(박정민), 엄마(윤여정)의 서로 다른 종류의 결핍은 각자의 방법으로 감춰지기도 드러나기도 한다. 매를 많이 맞아도 쓰러지지 말아야 하는 삶을 살아 온 조하는 두꺼운 근육으로 어리고 상처받은 기억을 방어하고 있고, 진태는 세상과의 소통이 불가능한 불편을 감당해야 하는 일상을 86개 건반 위에 쇼팽과 차이코프스키를 불러오는 방법으로, 엄마는 겨우 신라면, 너구리, 짜파게티지만 '뭐라도 거두어 먹이는' 일상을 살아냄으로써. 

영화는 넌지시 물어온다. 당신의 맷집 뒤에는 어떤 상처가 숨어있냐고. 
 
잘생김, 그것은 단지 편견일 뿐! 

영화를 완성하는 요소에는 연출, 연기, 음악, 미술, 촬영, 소품, 세트 등이 있다. 그러나 영화 개별적 속성에 따라 어떤 영화는 '세트'가 좀더 비중이 클 수 있고, 어떤 영화는 '촬영'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할 수도 있다.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스틸컷.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는 '이병헌 혹은 그의 연기'가 이 영화의 미술이기도 하고, 촬영이기도 하고, 소품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와이드 촬영(멀리서 찍는 촬영)에서도 전체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중심 에너지이다. 영화에 나오는 대사처럼, 그는 '도대체 어데서 뭐하고 살아왔기에' 지금의 그가 되었을까? 일단, 외피를 살펴보자. 얼굴은 잘 생겼는데, 다른 잘생긴 배우들과 구별되는 그의 개별성을 이 영화가 보여준다. 잘생김을 뚫고 나오는 '없어 보이고 구차한 모습'은 분명 그가 한 바퀴씩 만들어 온 나이테 어디쯤에선가 실제로 체험한 적이 있는 자료일 것이다. 

스파링을 하다가 강펀치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45도 각도로 '허리꺽임'없이 직선으로 하강하는 신체의 코믹한 형상은 각본과 연출의 계산이더라도, 대본에는 분명 '조하, 게걸스럽게 라면을 먹는다', '조하, 의자에서 일어나서 브레이크 댄스를 춘다', 혹은 '조하, 진태가 싼 오줌을 피해 짝발로 도망간다' 라고 쓰여 있었을 5초가 관객에게 어떤 맛깔스런 느낌으로 전달될 지는 순전히 이병헌의 본능적인 연기 감각에 달려있다.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스틸컷. = CJ 엔터테인먼트

 

가령, KFC 햄버거 트레이에 흩어져있는 잔돈을 오른손으로 하나씩 줍는 대신에, 왼손을 펼친 다음 오른손으로 트레이를 기울여 동전들을 왼손 손바닥으로 쏟는다거나 소파에 양반다리하고 앉은 채 상체만 숙여 마루바닥에 있는 과자를 집는다든가 '포도아이스바' 뚜껑을 손으로 뜯지 않고 입으로 뜯어 뱉는 그 1분 1초의 예민한 표현들이 모이고 쌓여 '조하'라는 캐릭터가 된다.

마치, 20세기에 태어나서 하루하루를 살아낸 이병헌이 21세기에서 현재의 중년을 살아내고 있는 이병헌이 되었듯이 말이다. 

우리 동네 수퍼 근처 어느 집 작은 방에 비루하게 살고 있을 것 같은 '쓰레빠와 츄리닝'의 동네 형, 조하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져갈 즈음에 우리는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누적된 입력이 쌓이고 쌓여 이제, 그의 돌아선 뒷모습의 떨림만 봐도 객석 여기저기에서 들썩들썩 훌쩍임이 들린다. 탄탄한 근육 속에 가두어 둔 천둥벌거숭이 같은 어리고 나약한 조하가 "그땐 나도 애였다구요."라고 말하면 "불가능이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일 뿐"이라고 말하던 허세작렬의 조하는 퇴장하고 마는 것이다. 

<내부자들> 정치 깡패, <마스터> 희대의 사기범, <남한산성> 주화파 이조판서까지 매 작품 장르와 캐릭터를 가리지 않는 완벽한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아 온 이병헌은 선 굵고 무게감 있는 캐릭터를 벗고 친근하고 인간미 넘치는 형 '조하'로 분해 "주 종목을 만났다"며 반가움과 자신감을 드러냈다.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탈한 느낌을 한껏 살린 헤어와 의상, 재치 넘치는 아이디어로 완성해낸 맛깔나는 애드리브 연기까지 선보이며 거친 겉모습 속 따뜻한 정을 지닌 '조하'의 츤데레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2016년 이준익 감독의 작품 <동주>에서 폭발적인 연기력을 선보이며 신인남우상 6관왕을 석권, 충무로 차세대 연기파 배우로 떠오른 박정민은 동생 '진태' 역으로 특별한 연기에 도전했다. 서번트증후군 동생 '진태'로 분한 박정민은 "연기생활에 있어 가장 특별한 경험"이라고 밝힐만큼 치열한 준비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진태' 역을 완성해 냈다.

영화 '그것만이 내세상' 스틸컷.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스틸컷. = CJ 엔터테인먼트

어눌한 말투부터 끊임없이 움직이는 손동작 등 섬세한 연기로 '진태' 캐릭터에 완벽 이입한 박정민은 수준급의 피아노 연주까지 소화해내며 몰입을 최고조로 끌어올릴 것이다. 전작의 무게감을 벗고 친근하고 인간미 넘치는 연기 변신을 선보인 이병헌과 섬세한 열연으로 서번트 증후군 캐릭터를 완벽 소화한 박정민,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이병헌과 박정민의 신선한 조합은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만의 아주 특별한 관람 포인트가 될 것이다. 

권투경기에서 연속공격동작을 '콤비네이션'이라고 부른다. 영화는 이병헌과 박정민의 콤비네이션이자, 라면과 쇼팽의 콤비네이션이기도 하다. 맷집이 강한 선수일지라도 제대로 된 콤비네이션으로 끊임없이 공격당하면 쓰러지듯이, 냉정한 마음으로 팔짱끼고 보더라도 당신의 가장 착하고 약한 마음을 공략해오는 연속 공격동작에 다리가 휘청일 수 있다. 한번 감당해 보시라. 

이병헌을 '스파링(대전형식의 연습) 파트너'로 인생연습을 한번 해 본다는 게 외국영화로는 맛볼 수 없는 한국 영화만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글쓴이 이 현 대표 이력은... 

중앙대 영어학과 /
크리스리픽쳐스 인터내셔널 대표 /
쇼박스 해외팀 외화수입 10년 /
BCWW드라마수출팀장 / 
오리콤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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