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돈
보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돈
  • 박재아 편집위원
  • 승인 2020.09.04 1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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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섬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큰 돈 '라이'가 지닌 의미
얍섬의 위치 ⓒ 태평양 관광기구 제공
얍섬의 위치. ⓒ 태평양 관광기구

[휴먼에이드포스트] 마이크로네시아를 이루는 4개의 섬 중 하나인 얍(Yap)에서 도둑질을 하려면 지게차와 포크레인이 필요하다. 힘센 장정은 많을수록 좋다.

이 섬에서 가장 비싼 물건은 도넛 모양으로 생긴 거대한 석회암(limestone)인데, 세상에서 제일 큰 돈인 이 돌덩이는 얍섬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다. 이름은 ‘라이’(Rai, 얍 언어로는 Raay), 화폐단위로는 페이(Fei)라 부른다.

마이크로네시아 얍(Yap)섬의 도넛 모양 돌화폐

얍섬에는 화강암처럼 단단하고 빛나는 광물이 없기 때문에 라이는 얍섬에서 650km 정도 떨어진 팔라우섬의 석회암 광산에서 만들어진다. 얍섬의 장정 수십 명이 팔라우까지 원정을 떠나 몇 주, 길게는 몇 달에 걸쳐 석회암 원석을 큼지막하게 캐서 원반 모양으로 다듬은 후, 운반을 위해 중앙에 구멍을 뚫어 도넛 모양으로 만든다. 구멍에 나무막대를 꽂아 어깨에 메고 해안가로 옮긴 후, 카누나 뗏목에 싣고 1~2주나 걸려 얍섬까지 옮겨와야 했다.

돌의 크기가 클수록 가치가 올라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라이의 크기는 점점 커졌다. 유럽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채석 도구가 도입되자 더욱 크고 빛나는 표면을 가진 라이가 생산되었다. 큰 것은 지름 3.6m, 두께 50cm, 무게는 4톤이나 된다.

너무 무거운 돌은 가공한 곳에 그대로 두고 라이를 만든 사람들의 증언에 기초해 돈의 형태와 품질을 ‘상상해’ 값을 매기기도 했다. 현재 남아 있는 라이는 대부분 웬만한 타이어보다 커서 바위 화폐(Stone Money)라 부른다. 25cm 정도 크기의 라이는 미국 달러로 6천 달러 정도의 화폐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얍섬의 사람들은 돌 자체보다도 라이를 가공하고 운반하는데 투여된 노동력과 돌을 옮기면서 희생된 사람들의 수 등 여러 상황을 고려해 라이의 가치를 매긴다.

돌의 크기가 클수록 가치가 올라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라이의 크기는 점점 커졌다. ⓒ 태평양 관광기구 제공
돌의 크기가 클수록 가치가 올라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라이의 크기는 점점 커졌다. ⓒ 태평양 관광기구

◆"보이지 않아도 믿을 수 있어"

전설에 의하면, 약 500년 전 얍섬의 어부들이 탄 배가 태풍을 만나 팔라우에 좌초되었는데, 이곳에서 단단하고 신비로운 빛이 감도는 화강암을 발견했다. 파편을 고래 모양으로 조각해 가지고 돌아온 어부들은 이를 '돈'이라며 마을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이때부터 얍에서 돈은 고래라는 뜻의 라이(Rai)와 동음이의어로 쓰이게 되었다.

이 아름다운 '돈'을 들여오기 위해 얍섬의 부족장들은 앞다투어 채굴 원정팀을 꾸려 팔라우로 보냈다. 팔라우에는 구슬(비즈)이나 코코넛 같은 식물들을 채굴의 대가로 지불했다. 거대하고 무거운 라이를 뗏목이나 바지선에 싣고 돌아오던 중 무게를 견디지 못한 배가 가라앉을 위기에 처하거나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몇 명이나 희생되었는지, 얼마나 거대한 폭풍을 만났는지, 침략자의 공격에 대해 어떻게 용맹하게 맞섰는지 등 라이를 가공하고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큰 수고가 따랐는 지에 비례해 라이의 가치는 오르고 내렸다. 물론 이야기가 너무 과장되었거나 거짓일 경우 값이 폭락하기도 했다.

‘돈’을 들여오기 위해 얍섬의 부족장들은 앞다투어 채굴 원정팀을 꾸려 팔라우로 보냈다. ⓒ 태평양 관광기구 제공
'돈'을 들여오기 위해 얍섬의 부족장들은 앞다투어 채굴 원정팀을 꾸려 팔라우로 보냈다. ⓒ 태평양 관광기구 

가치가 계속 변하는 돈

얍섬의 사람들에게 라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조금 더 깊이 알게 되면 그저 거대한 돌덩이로만 보이지 않는다. 라이는 화폐 이상의 가치를 지닌 '기록'이다.

손주가 성인이 되면 할아버지는 대대손손 간직해 온 라이를 물려주며 마을 사람들에게 라이의 소유주가 바뀌었음을 알리는 축제를 열기도 한다. 불미스러운 일이나 파혼 등으로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었을 때도 깊은 사과의 의미로 라이를 선물했다. 라이는 주고받는 사람의 마음과 상황에 따라서도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라이는 보통 땅이나 집, 결혼 지참금 등 중요한 거래에 사용되었고, 생필품과 먹거리를 사는 데는 심황, 진주조개, 바나나, 돗자리, 나무 공이 등이 화폐로 사용되었다. 1990년대 초부터 라이를 직접 보기 위해 몰려든 관광객들, 상인들 때문에 미국 달러와 유로화가 유입되어 전통 화폐는 일부 부족 사이에서만 통용된다.

비트코인의 원조?

라이가 유명해진 것은 세계적인 화폐 학자인 밀튼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 저서 <화폐경제학>에서, 최근에는 <돈의 정석>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된 '네이키드 머니(Naked Money)'(저자: 찰스 윌러)에서도 라이가 언급되었다. 라이와 비트코인의 유통과정 원리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그 존재를 믿으면, 실물로 보이지 않아도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는 점에서 라이와 비트코인은 유사점이 있다. 거래되는 금액의 단위, 가치가 큰 만큼 라이는 단순히 물물교환의 수단이 아니라, 개개인과 가문의 이야기를 담은 기록 저장소로서 의미가 더 컸다.

블록체인에서는 위조가 불가능한 '장부'에 거래내역을 담지만, 얍섬에서는 라이의 소유주가 바뀌게 된 배경을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공유하고 사람들은 이때 거래 혹은 증여된 라이를 볼 때마다 이야기를 떠올린다. 얍섬에는 사람들에게 '공유된 기억'이 거래 장부다. 이는 얍섬의 사회를 투명하고 안전하게 지탱하는 '공통의 신념'이기도 하다.

얍섬의 사람들은 태풍이 잦고 이동거리도 멀어 길게는 편도로 2주나 걸리는 팔라우섬까지 원정을 떠나 화강암을 '캐내고' 다듬어 힘겹게 얍섬까지 운반해 왔다. 암호화폐를 '채굴'하려면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점과 유사하다.

라이는 공개적인 장소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누구나 직관적으로 돌의 크기와 품질을 가늠할 수 있으며, 표면에 아무런 표시가 되어 있지 않지만 얍섬에 사는 사람 거의 모두가 돌의 소유자가 누군지 알고 있다. 비트코인 역시 디지털 공간에 누구든 정확도와 가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보관되어 있다. 물론 두 화폐 모두 흥정과 교환이 가능하다.

ⓒ 태평양 관광기구 

◆'태평양 섬 지킴이' 믿음과 관심의 돈

환율에 따라 조금씩 가치가 변동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화폐에는 일정한 값이 매겨져 있다. 하지만 축의금, 위자료, 용돈 등 상황과 주고받는 이들의 마음에 따라 돈의 가치는 달라진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의 주머니가 얇아지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베풀기보다는 움켜쥐게 된다. 하지만 어려울 때 베푸는 온정의 손길에는 평소보다 더 큰 가치가 담긴다.

얍섬을 비롯해 태평양의 거의 모든 섬은 기후 온난화의 최대 피해 지역으로 해수면이 상승하여 키리바시 등 일부 섬나라는 50년 안에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에 '태평양 살리기' 비트코인 발행을 제안해 볼까 한다. 얍섬 어딘가에 '우리 국민들의 태평양 섬사람들을 돕기 위해 구매한 라이'가 세워져 대대손손 미담으로 전해질 테니.

 

박재아_주한 태평양 관광기구(SPTO) 대표
박재아_주한 태평양 관광기구(SPTO)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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