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화 작가의 예술산책] 익숙함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시선의 차이
[홍일화 작가의 예술산책] 익숙함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시선의 차이
  • 홍일화 편집위원
  • 승인 2020.12.09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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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에이드포스트] 공포영화 속 소재나 영화 속 소품들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사람의 형상을 표현하는 마네킹, 석고상, 그리고 초상화이다. 초상화 속에 영혼이 깃든다고 하여 눈동자가 움직이고 그림이 살아있다는 이유로 공포영화 속 섬뜩한 소재로 사용된다. 
벌써 13년이 지난 영화이기는 하지만 2007년 상영된 베트남 초상화의 전설 <므이>라는 영화를 보면 '초상화를 보는 자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므이 초상화는 정말 강한 혼령이 느껴졌대… 눈을 보고 있으면 므이에게 영혼을 빼앗기고 있는 것 같아서…"라고 영화의 예고편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나는 사람의 눈을 그리기 좋아하는 초상화 작가다. 그림을 그릴 때 제일 먼저 눈을 그리기 시작하고 그림의 마무리 또한 눈으로 끝낸다. 개인적으로 말로 하는 대화보다 눈으로의 대화에 대한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기 때문이다.
잠시 눈을 떠나 그림에 대한 공포 에피소드를 말하고자 한다. 컬렉터 한 분께서 회사원들의 인문. 예술적 소양과 감성의 박전을 위해 새로운 작품을 소장하시면 반드시 회사원들이 자주 드나드는 식당이나 회사 내 피트니스센터, 사무실 복도에 그림을 걸어 놓으신다. 내 초기작 그림들은 지금 그림들에 비해 눈이 훨씬 더 과장되면서 앞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5점의 그림이 피트니스 센터 입구 벽면에 걸려 있었는데 이 그림들이 무섭다고 운동하러 못가겠다고 회사 회장님께 탄원하여 사원들이 자주 가지 않는 회사 내 미술관으로 옮겨졌다는 씁쓸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한국의 경우 미술관이나 전시장을 제외한 일반 가정에서 초상화를 보는 것이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기에 이 부분에 대해 마음은 아팠지만 어느 정도 수긍은 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경우가 있기에 한편으로는 내 그림 탓만이 아니라고 위로를 받기도 했다. 서양화가 중에 여성의 우아한 한복의 뒤태를 극사실로 묘사를 하는 정 아무개 화가가 있다. 이 화가의 작품이 회사 식당 내 걸려 있었다. 화려한 한복의 질감과 장신구 그리고 자수의 섬세함이 정교하게 표현된 그림이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 걸려 있지 못했다. 이유인즉 한복 치마 밑에 발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당직을 서는 직원들 사이에 무서운 괴담의 소재가 되었다. 그림 속 한복을 입은 여인이 밤마다 회사를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작가들에게 있어 혼이 깃든 그림을 그린다는 것만큼 좋은 찬사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초상화에 대한 어려운 시선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눈이 너무 좋아 그 눈빛에 반해 내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눈이 무서워서 내 그림이 무섭다고 하는 이들 또한 있다. 유럽과 아시아 아니 좀 더 범위를 좁혀 내가 거주하며 경험한 한국과 프랑스 두 문화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 무서움에 대한 이유를 해명하기에 좀 더 용이할 것이다.


우선 첫 번째로 두 나라 간의 시선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내가 프랑스에 적응하는 데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 연인의 눈을 사랑스레 쳐다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눈과 눈이 장시간 마주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있다. 나이가 많은 어른의 눈을 똑바로 보게 되면 “어디서 눈을 치켜뜨나, 예의 없게 어른 눈을 똑바로 쳐다보냐”는 식으로 타박을 받았다.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과 우연히 눈을 마주치면 “왜 쳐다보냐, 야리냐, 갈구냐, 눈깔아”등의 저속한 표현이 난무했다, 아니 지금도 별반 차이는 없다. 
하지만 프랑스의 경우는 정반대다. 대화를 나눌 때 눈을 마주치고 있지 않으면 예의가 없는 것이거나 대화하는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는 것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나의 경우 프랑스 예절을 맞추기 위해 상대방의 콧등을 보며 시선의 두려움에 대한 공포를 극복했다. 그리고 이후 눈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눈에 대한 공부를 집중적으로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직도 이 시선에 대한 문화의 차이로 양국을 오갈 때 많은 혼돈과 어려움이 초래되기는 하지만 나의 개인적인 의견은 눈을 바라보며 호감을 표현하고 눈을 바라보며 상대방의 세심한 감정변화를 느끼는 게 사람이 사람과의 만남의 도리이며 예의라고 믿는다. 

두 번째로 장례문화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한국의 경우 집안에 상이 나면 고인의 사진이며 소지품 등을 모두 불태워버린다. 그리고 그 후로는 고인을 다시 뵐 수 있는 공식적인 날이 제삿날뿐이다. 왠지 정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프랑스의 경우는 사용 가능한 고인의 물건을 모두 간직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딸이 어머니의 옷을 입거나 시계, 가방 등을 들고 다니면서 자랑한다. 여기서 대대로 들고 소지한다는 프랑스 명품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을 집안 곳곳에 걸어놓는다. 프랑스 가정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 가장 큰 문화충격이 바로 이 고인의 사진과 초상화다. 증조부, 고조부,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 심지어 사촌들 사진까지 온갖 곳곳에 걸어놓고 있다.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으면 사진 한장 한장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면서 가족사에 대한 설명까지 상세하게 꺼내놓으며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잠깐 샛길로 빠지기는 하지만 이런 양상은 종교에서도 볼 수 있다. 천주교에서는 성인의 육체보다는 성자가 지녔던 유품에 대해 중점을 두는 반면, 불교에서 성인이 지녔던 유품보다 성인의 정신과 그 육체 자체에 비중을 두는 차이점을 볼 수 있다. 종교 얘기로 들어가면 글이 너무 길어질 수 있는 관계로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짓는 게 좋겠다. 이렇듯 두 문화의 시선에 대한 견해나 고인에 대한 사진이나 초상화에 대한 생활 모습은 상반된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익숙함의 차이다. 프랑스인들에게 초상화는 친숙한 소재로 대화를 나누기에 가장 익숙한 문화인 반면, 한국의 경우는 초상화를 고인의 영혼이 깃든 유물로 생각하기에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리고 시선 또한 그러하다. 한국에서 초상화나 인물사진을 보면 마치 튀어나와 혼낼 것만 같고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들 것만 같다는 게 대부분의 의견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경우 일반인들이 초상화를 접할 때 제일 먼저 눈을 보며 호감을 드러내는 습관으로 받아들인다. 똑같은 작품들을 양국 간에 전시할 때 상반된 반응만을 가지고 어디가 맞는다고 잘잘못을 따질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선입견 때문에 시선을 회피하고 피해가면서 내가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는 다양성을 거부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더 큰 변화를 일으켜야 하는데 다름을 틀리다고 표현하는 일상 한국인의 대화에서부터 그 변화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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