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은 곳 ‘낙선재’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은 곳 ‘낙선재’
  • 나은미 객원기자
  • 승인 2021.06.2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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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의 사랑과 개혁의지 담긴 낙선재
낙선재 전경(헌종이 궁궐 안에 경빈 김씨를 위해 지었다고 함) ⓒ 나은미 객원기자
낙선재 전경(헌종이 궁궐 안에 경빈 김씨를 위해 지었다고 함) ⓒ 나은미 객원기자

[휴먼에이드포스트] 자연 지형인 언덕과 물길을 그대로 살려 지었다는 아름다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창덕궁(昌德宮, 사적 제122호)'. 그 오른쪽에는 창경궁과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둔 '낙선재(樂善齋, 보물:제1764호)'가 단아하게 자리 잡고 있다. 양반가 형식을 따랐으나 궁궐 침전 양식을 가미한 낙선재. 단청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평소 검소한 생활을 했던 제21대 왕 영조를 존경하고 그 뜻을 따르고자 했던 제24대 왕 헌종(憲宗, 1827~1849)의 의중이 깊이 반영되어 있다.     

 

1847년(헌종 13) 건립된 '낙선재(樂善齋)'의 명칭은 '인의충신(仁義忠信)으로 선(善)을 즐기고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천작(天爵; 하늘이 내린 벼슬)이다'라는 <맹자>의 구절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단청 없이 사대부 가옥 형식으로 건축하여 여느 궁궐 내 건물과는 달리 소박한 모습이나 여러 자재를 고도의 기술로 다듬어 섬세하고 아름답게 장식하고 수준 높고 다양한 창호를 설치함으로써 궁궐의 권위와 위엄을 잘 보여준다. 대한제국 황실 가족이 1989년까지 살았던 곳이라서 궁궐 전각 중 사람의 흔적을 그나마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장락문 ⓒ 나은미 객원기자
장락문 ⓒ 나은미 객원기자

이곳에는 '오래도록 즐거움이 있다'는 의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쓴 글을 새겼다는 장락문(長樂門)이 가장 먼저 맞아준다. 장락문을 통과하면 '선을 즐긴다'는 낙선재를 바로 만날 수 있는데 건립 당시 헌종의 뜻처럼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랑하는 후궁 경빈김씨를 위해 창덕궁 내에 낙선재를 지어 자신과 경빈의 사랑채로 사용하였으며 경빈의 처소로 석복헌(錫福軒)을 지어 곁에 두었으나 겨우 2년밖에 거처하지 못한 것이다.

조선 제24대 임금인 헌종의 본명은 '이환(李奐)'이다.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인 8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 '효명세자(본명 이영, 이후 익종에 봉해짐)'가 22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자, 겨우 4세의 어린 헌종은 그 뒤를 이어 할아버지 순조에 의해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다시 4년 뒤 순조마저 승하한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헌종이었기에 할머니였던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섰고, 헌종은 경연에 나아가 제왕학 수업을 착실히 쌓아 나갔다.

헌종의 첫 부인 '효현왕후 안동김씨'가 자식이 없이 16세에 일찍 죽자 왕실에서는 궁의 법도에 따라 대왕대비 의중대로 '효정왕후 남양홍씨'를 두 번째 정실로 들였다. 그러나 왕후가 될 후보자 가운데 '김재청의 딸 광산김씨'를 마음을 두었던 헌종은 이후 후궁 간택에서 그녀를 낙점하여 '경빈'으로 간택하게 된다. 그리고 할머니인 대왕대비 순원왕후와 자신, 그리고 자신이 총애하던 후궁 경빈김씨의 처소를 한 곳에 마련하고 이름을 각각 수강재(제23대 순조의 정비 순원왕후), 낙선재(헌종), 석복헌(경빈김씨)이라 붙였다. 

수강재 ⓒ 나은미 객원기자
수강재 ⓒ 나은미 객원기자
보소당 ⓒ 나은미 객원기자
보소당 ⓒ 나은미 객원기자

왕조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헌종은 낙선재에 머물렀고, 경빈김씨는 그 바로 옆 석복헌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낙선재 내부에 '보소당(寶蘇堂)'이라는 현판은 송나라의 대문인인 '소동파를 보배롭게 여기는 집'이라는 뜻인데, 추사 김정희와 교분이 두터웠던 서예가이자 학자인 옹방강(翁方綱)의 당호였던 보소재를 본떠 지은 이름이라 한다. 살아생전에 문예 군주를 꿈꾸었던 헌종이 이 보소당이라는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 효명세자(익종)가 그러했던 것처럼 헌종 역시 학문과 문예를 좋아했고 이곳 낙선재에 머물면서 글을 읽고 서화를 감상하기를 즐겼다 한다. 

헌종이 집권하는 동안 서양의 통상 압력이 날로 거세진 데다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등 특정 세력으로 인해 민중의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도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 헌종의 치세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김대건 신부가 처형되기도 했다. 그런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왕위에 머물던 현종은 15년 재위에 23세라는 젊은 나이로 ‘중희당(重熙堂)’에서 생을 마감했다. 요동치는 조선의 정세 속에서도 학문을 좋아하고 영특하여 제22대 정조대왕에 이은 문예 군주가 될 수 있었던 헌종이었다. 

사랑하는 후궁을 위해 낙선재를 선사한 지 불과 2년여 뒤인 1849년 헌종이 승하하자, 경빈김씨는 낙선재를 떠나 안국동 일대에 머물렀다고 한다. 창덕궁 낙선재, 단청 없이 화려하지 않은 공간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헌종의 경빈김씨를 향한 꾸밈없는 마음이 느껴진다.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았다.'
역사의 손때처럼 이끼가 덮인 시간 속에서도 기품 넘치게 선을 즐기는 낙선재의 이름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기에 헌종의 짧은 사랑이 그리 슬프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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