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양희은' 노래 인생 51년 그리고 라디오 DJ
'가수 양희은' 노래 인생 51년 그리고 라디오 DJ
  • 안나겸 기자
  • 승인 2021.06.24 16: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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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소중히 하는 것이 내 일의 비결
'그러라 그래'의 작가로 대중을 만나는 양희은. ⓒ 김영사
'그러라 그래'의 작가로 대중을 만나는 양희은. ⓒ 김영사

[휴먼에이드포스트] 1971년 가을, 첫 음반 <아침이슬>을 발표하며 통기타 가수로 데뷔한 양희은(楊姬銀69)은 매일 아침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서 청취자들과 친근한 대화를 나누는 친구 같은 존재다. 무엇보다 가수 인생 51년동안 '아침 이슬'을 비롯해 '세노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한계령' '한 사람'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엄마가 딸에게'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낸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그러나 오늘은 자신의 소박한 이야기를 글로 쓴 에세이 <그러라 그래>의 작가로 대중을 만난다. 그녀가 들려주는 소탈하고 담백한 이야기, 사람 사는 이야기, 생활을 가열차게 밀어가는 이야기를 통해 내밀한 인생 가치관을 보여준다.  

 

#1. 노래하는 가수, 양희은
노래가 나를 달래준 첫 기억은 39세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던 13세 때부터다. 가슴에 휑하니 바람이 든 것 같을 때마다 대문 밖 느타나무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다. '라 노비아' '화이트 크리스마스' 등 아버지가 평소 좋아하시던 노래를 불렀다. 
중고교 시절 6년 동안은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늘 교단에 섰다. 고2 때는 민속무용대회에서 사용할 배경음악이 필요해서 무작정 동양방송(TBC) 라디오국을 찾아갔었다. 처음 만나는 라디오 PD들에게 부탁해서 허락을 받았고, 그분들 덕에 방송국까지 두루 구경할 수 있었다. 그때 방송 일에 관심을 가졌고 앞으로 이쪽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재수하고 대학에 붙었지만 엄마의 빚보증과 양장점 화재로 인해 우리 집은 다시 일어서기 힘들 만큼 살림이 무너졌다. 빨간색 차압 딱지가 붙었던 그날, 나는 송창식 형이 노래하는 '오비스캐빈(O.B’s CABIN)'에 찾아가 돈이 필요하니 노래를 부르겠다고 말했다. 창식 형은 오디션을 보게 해주었고 당장 이튿날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남들은 놀러 나오는 명동에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했다. 그러나 갚아도 갚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빚더미에 눌려 19세 하루하루는 기운도 없고 희망도 없이 그저 깜깜했다. 하지만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태산에 걸려 넘어지는 법은 없다고, 뭐 엄청 대단한 사람이 우리를 위로한다기보다 진심 어린 말과 눈빛이 우리를 일으킨다는 걸 배웠다. 세상천지 기댈 곳 없고 내 편은 어디에도 없구나 싶을 때, 따뜻한 기억들이 나를 위로하며 안 보이는 길을 더듬어 다시 한 반짝 내딛게 해준다는 걸 알았다.  
1971년 초봄, 대한일보사 꼭대기층 강당에서 미국 가는 선배의 환송 기념으로 갖게 된 작은 음악회에 가게 되었다. 그날 그 자리에서 나는 '아침 이슬'을 처음 들었다. 훗날 그 노래와 이름이 한 데 묶여져 50년 넘게 따라다닐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그 노래에 빠려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집에 와서 나는 찢긴 악보 몇 조각을 정성스레 펴고 조각을 맞추어 테이프로 붙였다. 그리고 1971년 가을 첫 음반을 만들게 됐을 때 음반에 수록될 노래로 고민 없이 <아침 이슬>을 꼽았다. 김민기도 나의 부탁에 "그래라!" 한 마디로 허락해주었다. 

#2. 라디오 DJ하는 방송인, 양희은
송창식 형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고교시절 특활반인 영어회화 클럽에서 창립기념일에 직속 선배인 윤형주 형을 초대했었다. 그때는 송창식, 윤형주 두 사람이 '트윈폴리오' 활동을 할 때라 늘 같이 다니곤 했다. 그 행사에 재학생 대표로 내가 답가를 했는데 반주 없이 노래를 부르니까 두 분이 기타 반주로 감싸주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형주 형이 같은 교회의 우리 학교 아이를 찾아 양희은이라는 학생에게 건네주라며 트윈폴리오 공연 초대장을 주셨다. 
그렇게 맺은 인연은 '청개구리'에서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청개구리'는 서울 YMCA 식당을 개조한 앉은뱅이식 좌식다방으로 입장료는 100원이었다. 우리나라 통기타 문화의 1세대와 2세대가 만날 수 있었던 의미 깊은 곳이다. 가세가 기울어 나는 형이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 노래를 부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창식 형은 이종환 선생님 앞에 날 데려갔다. 그렇게 나는 송창식 형의 적극 추천에 힘입어 세상 앞에 섰고 처음으로 돈을 받고 노래를 하게 되었다. 내가 시궁창에 엎어져 있을 때 처음 손을 잡아준 바로 그 선배다. 
2018년 가을, 그랬던 10대 소녀가 67세가 되어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3번째 단독 콘서트로 다시 서게 되었다. 50여 년의 노래 인생이 순식간에 지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 무대로 안내해준 송창식 선배에 대한 새삼스러운 고마움으로 가슴이 벅차 왔다. "쭉 같이 노래하고 싶었어. 그런데 넌 노래가 전부는 아니더라." 송창식 선배는 내가 노래에 올인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때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하고 묻지 않았다. 그 말이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다. 
노래와 동시에 시작한 라디오는 부담이 없었고 싫증이 안 났으며, 늘 새로운 사연들이 재미있고 또 음악에 귀 기울이는 시간도 좋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호감과 호기심이 마이크 앞에 나를 앉혔고, 그 마음은 한결같다. 

#3. 삶과 생활과 친구, 양희은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서 만난 편지는 어쩔 수 없다. 힘겨운 사연의 무게만큼 가슴에도 징건하니 얹힌다. 하지만 어느 날 깨달았다. 마음이 너무 망가져서 자기 속 이야기를 끄집어내지도 못하고 글로도 쓰지 못하는 누군가가 자신과 비슷한 사연을 방송으로 들을 때 조금은 자기 객관화를 시킬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보듯 거리를 두고 자기 인생을 보게 되는 것. 그러고 나면 어디엔가 도움을 청하는 등등의 단호한 결단을 내릴 수 있다. 
용기 내어 뛰쳐나오는 결단을 내린 다른 편지를 보면서 '아 어쩌면 이게 답이구나'하고 깨달았다. 자기 사연을 남의 목소리로 들으면서 객관화가 되고,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가 그 얘길 들으면서 공감하며 응원해주는 것을 경험한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파장이 서로를 연대시키며 거대한 어깨동무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세상을 묶어주는 띠가 되어 기댈 곳 없는 마음을 잡아주기도 한다. 그 사람의 얘기를 잘 듣고 '그래서 아팠구나, 나라도 그랬겠다'하고 공감할 뿐이다. 
다만, 자기 생활은 버려두고 대본만 들입다 파고 있어 봤자 생활이 없는 배우는 진짜 배우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생활이 없는 방송인 역시 빈껍데기다. 빙산의 밑동이 든든해야 그 일각이 드러나는 법! 일상생활의 밑바탕, 살아있는 이야기, 삶의 고비들이 밑에서 든든하게 받쳐주어야만 방송에서 하는 말도 살아난다. 사생활에서 나는 철저히 주부로 산다. 라디오 방송, TV 출연, 공연 등등 일이 물론 중요하지만 퇴근 후의 사생활도 소중하다. 내가 무대에서든 방송에서든 살아 있는 얘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일하는 양희은' 외에 '주부로서의 일상'이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 바깥의 일상을 소중히 하는 것, 그것이 내 일의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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