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미 기자의 역사이야기] 아픈 역사 속의 고종과 커피, 그리고 정관원 이야기
[나은미 기자의 역사이야기] 아픈 역사 속의 고종과 커피, 그리고 정관원 이야기
  • 나은미 객원기자
  • 승인 2021.08.2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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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이 자리한 덕수궁 전경 ⓒ 나은미 객원기자
국립현대미술관이 자리한 덕수궁 전경 ⓒ 나은미 객원기자
덕수궁 내의 유일한 서양식 건물 정관헌 ⓒ 나은미 객원기자
덕수궁 내의 유일한 서양식 건물 정관헌 ⓒ 나은미 객원기자

[휴먼에이드포스트] 고단함을 덜어주고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커피, 현대 사회에서 커피는 일상이자 습관처럼 모든 연령층의 기호품으로 깊게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다. 가정이나 직장, 또한 거리 어디에서든 평범한 삶의 일부인 듯 모든 사람들이 커피를 쉽게 접하고 있다. 이렇게 대중적인 기호품이지만 조선 왕조 궁궐 속 커피에 얽힌 역사 이야기를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최근 10년 동안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업체가 덕수궁 정관헌에서 대중과의 커피 문화체험 행사를 후원해 왔다고 한다. 커피와 궁궐에 어떤 교집합이 있기에 이런 이색적인 문화행사가 이어져 온 걸까. 궁궐의 커피 이야기는 수년 전 영화 <가비>를 통해 대중에게 소개된 적이 있다. 

다소 낯선 제목의 영화 <가비(加比)>는 커피(Coffee)의 영어발음을 따서 부른 고어(古語)인데, 고종 황제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 커피를 심도 있는 소재로 다루고 있다.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재위 1863∼1907) 고종은 커피 애호가였다. 난세(亂世)의 시름을 잊고 조용히 사색하기 위해 자주 찾았던 곳이 바로 덕수궁의 ‘정관헌’이다.  

정관헌은 '덕수궁(사적 제124호)' 내에 있는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이다. 화려하고 독특한 양식으로 눈길을 끄는 '정관헌(德壽宮 靜觀軒)'은 덕수궁의 침전인 함녕전(咸寧殿)과 편전인 덕홍전(德弘殿) 뒤편 언덕에 있다. 

경복궁이나 창경궁과는 달리 서양식 건물이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단연 눈에 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환궁할 무렵 몇 채의 서양식 건물을 궁내에 지었는데 정관헌도 그 당시 건립된 초기 서양식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오래된 건축물을 '고요하게(靜) 내다본다(觀)'는 뜻을 지닌 정관헌은 태조·고종·순종의 영정과 어진이 모셔지기도 했다. 또한 솔밭이 어우러진 함녕전(咸寧殿) 뒤에 자리하고 있어 후원의 정자 기능을 대신했다고 알려져 있다. 

정관헌 내부 ⓒ 나은미 객원기자
정관헌 내부 ⓒ 나은미 객원기자
정관헌 건물 기둥에 새겨진 아름다운 장식 ⓒ 나은미 객원기자
정관헌 건물 기둥에 새겨진 아름다운 장식 ⓒ 나은미 객원기자

대한제국 시절 고종이 휴식을 취하거나 외교사절단을 맞아 연회를 여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정관헌과 고종의 커피 인연은 역사적 우여곡절과 함께한다. 1895년(고종 32)에 명성황후가 낭인을 가장한 일본 엘리트에 의해 잔인하게 시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났다.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는 1896년 2월11일부터 약 1년간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를 ‘아관파천’이라 한다. 고종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를 잃고 난 후 일본에 대항할 힘이 없음을 한탄하며 러시아의 힘을 빌려 국권을 세우고자 했다. 

그 당시 초대 러시아 공사였던 웨베르의 처형 ‘손탁’ 여사에 의해 고종이 처음 커피를 접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고종은 러시아 공관에서 1년을 머무르는 동안 때때로 커피를 마시며 불안감과 고통의 시간을 감내했다고 한다. 이후 덕수궁으로 돌아온 후에는 주로 정헌관에서 커피를 즐긴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커피 애호가라고 전해지는 고종에게 발생한 ‘김흥륙 독차사건’은 세상이 상상했던 왕가의 낭만적인 커피가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아관파천 시 통역을 담당했던 김홍륙에 의해 고종이 독살 당할 위기에 처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고종의 생일인 1898년 9월12일 김흥륙은 궁내에서 일하던 공홍식과 김종화를 매수하여 아편을 잔뜩 넣은 커피를 고종에게 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커피의 맛에 익숙했던 터라 독 커피의 맛이 이상하다고 뱉어버리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 황태자 신분이던 '이척(李坧, 순종)'은 커피에 익숙지 않아 맛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몸이 약했던 순종은 구토와 실신을 거듭한 끝에 치아까지 모두 빠지는 끔찍한 참변을 겪으며 일생 동안 틀니를 하며 지내야 했다.

고종은 1919년 1월21일 오전 6시경 덕수궁 함녕전에서 68세로 사망했으며 공식적 사인은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로 인한 자연사이다. 하지만 독살된 것이라는 염쟁이 한진창의 증언과 기록으로 인해 고종의 장례식인 1919년 3월3일을 기해 '국상(國喪)을 치른다'는 명분으로 종로에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한다’는 계획이 세워진다. 이것이 바로 3·1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2021년 5월 문화재청 궁릉유적본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재재단이 주관하는 궁궐 활용 축제 궁중문화축전이 경복궁과 덕수궁에서 각각 진행되었다. 고종이 마셨던 '커피'를 조명하고, 그 안에 담긴 조선 왕실과 궁궐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당시 황제가 마셨던 원두로 블랜딩한 커피를 재현해 관람객에 증정하는 <고종의 가배> 기획 행사였다. 

'가배'는 커피의 한자식 발음으로 1852년 윤종의의 벽위신편에 ‘가비’로 처음 등장한 후, 1898년 조선왕조실록 고종 38권과 공식문건에 '가배다' 혹은 '가배차'로 표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종과 커피의 인연, 쓰디쓴 역사와 비극이 남겨진 덕수궁 정관헌에서 오늘날 대중은 과거를 잇는 이색적인 체험으로 궁궐 커피 문화를 만난다. 

'고종 커피'라는 아이템이 문화적, 상업적 역할까지 하게 된 지금이지만, 당시 고종의 커피는 수많은 독살의 위험 속에서 삶과 죽음을 확인하는 고통이 함께 했기에 씁쓸하고도 '반짝 깨어있는' 정신적 향기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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