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미 기자의 역사이야기] 나라를 지키려는 염원 속의 남한산성
[나은미 기자의 역사이야기] 나라를 지키려는 염원 속의 남한산성
  • 나은미 객원기자
  • 승인 2021.10.2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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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행궁 ⓒ 나은미 객원기자
남한산성 행궁 ⓒ 나은미 객원기자

[휴먼에이드포스트]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기원은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672)의 옛터를 활용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대대적으로 구축하였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으로 둘레가 12km에 이른다. 산 위에 도시가 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이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 전쟁 시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였다.
또한 다른 산성들과는 달리 산성 내에 마을과 종묘·사직을 갖추어 전쟁이나 나라에 비상이 있을 때, 임금은 한양도성에서 나와 남한산성 행궁에 머무르고, 종묘에 있는 선조의 신주(神主)를 옮길 수 있는 좌전을 마련하여 조선의 임시수도로서 역할을 하였다.
남한산성은 1963년 사적 제57호 지정되었으며 지난 2014년 6월에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저 먼 옛날 삼국시대, 백제의 흔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나이테처럼 두르고 있어 특별히 기억될 만한 곳이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 24km 떨어진 남한산성(南漢山城, 현 남한산성도립공원)은 해발 523.9m의 검단산과 522.1m의 남한산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497m의 청량산을 주봉으로 하여 수도 서울을 방비하기 위한 산성 중 하나다. 성벽 바깥은 경사가 급하여 적의 접근이 어려운데 비해, 성벽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와 수호가 용이하다.

남한산성 남문 ⓒ 나은미 객원기자
남한산성 남문 ⓒ 나은미 객원기자
수어장대 ⓒ 나은미 객원기자
수어장대 ⓒ 나은미 객원기자

백제 온조왕과 조선 인조왕의 만남, 남한산성
한강유역에 도읍을 정한 백제는 내·외적인 여건으로 인하여 하북위례성-하남위례성-한산-한성 등 여러 번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남한산성이 백제 온조와 직접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다. 병자호란 직후인 1639년 남한산성에 백제 시조 온조왕의 사당이 건립된 것이다. 온조왕 사당이 조선시대에 처음 건립된 곳은 충청도 직산현이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예조판서 김상헌을 온조왕 사당에 보내어 제사를 지낸 바 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남한산성이 온조가 도읍한 곳이라고 이해되고 있었기에, 이곳에 피신한 인조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온조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 같은 그의 염원은 꿈으로도 발현되었다. 꿈에 나타난 온조의 도움을 받아 남한산성을 공격하는 청군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조는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인 1639년 온조사당을 직산에서 남한산성으로 옮겼으며 정조대인 1795년에 숭렬이라는 명칭이 국가로부터 내려지면서 숭렬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남한산성의 역사는 조선시대를 거슬러 올라 고려와 통일신라 그리고 삼국시대 백제로 귀결된다. 본래 고구려의 태조인 고주몽(동명성왕)이 첫째부인 예씨의 아들 유리를 후계자로 삼자, 둘째부인 여대왕 소서노는 전 남편에게서 낳은 아들 비류와 온조 외에 10명의 신하를 데리고 남하해 '십제(열명 신하의 도움으로 건국했다는 뜻)'를 세운다. 
이때 큰아들 비류는 바닷가로 가서 미추홀(인천)을 도읍으로 정하고, 작은아들 온조는 한강이 있는 하남위례성(남한산성)을 도읍으로 정한다. 얼마 후 염도가 많은 미추홀에서 곡식 농사에 실패한 비류는 근심으로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그를 따라갔던 신하와 백성들이 온조왕에게 합류해 ‘백제’를 이룬다. 이후 온조왕은 죽어서 이곳 남한산성에 묻힌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토대로 <고려사>와 <세종실록> 지리지 편에는 '온조왕 13년에 산성을 쌓고 남한산성이라 부른 것이 처음'이라는 기록을 적는다. 이후 조선시대인 1626년(인조 4)에는 남한산성을 축성한 백제 온조왕의 넋을 기리기 위해 초혼각으로 '숭렬전'을 세우고, 이어 1638년(인조 16)에는 온조왕묘를 건립해 배양했으며, 1795년(정조 19)에는 왕명에 의해 '숭렬전' 편액(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을 내린다. 특히 이곳 숭렬전에는 남한산성 축성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때 적과 싸우다가 병사한 '수어사 이서'의 위패를 함께 두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1985년 첫 지표조사를 실시하고 1998년부터 8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 주거지 2곳과 저장 구덩이 8곳을 확인했다. 이는 132년 백제 개루왕 5년에 세운 북한산성과 더불어 중요한 삼국시대 사료가 되고 있다. 하남위례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처음 축성된 북한산성은 당시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던 전략적 요충지며, 핵심 군사력을 배치해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던 성으로 4세기 근초고왕이 북진정책을 펼칠 때 북벌군의 중심 요새였다. 그러한 북한산성과 더불어 천혜의 요새로 자리한 남한산성은 아직도 풀어야 할, 백제의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흔히 조선시대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1636년(인조 14) 청나라가 침략해 오자 인조 임금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했다. 그러나 왕자들이 피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결국 인조 임금은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송파 삼전도로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남한산성을 비극의 장소로 잘못 알고 있지만,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난공불락의 요새다. 산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침입이 어려운 형국이고, 성안 내부는 흙으로 다져져 경사가 완만하다. 넓은 경작지와 더불어 여러 개의 우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군대에 함락당하지 않고 45일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오랜 남한산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다.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등과 더불어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다. 이를 인조 때 재정비해 중앙부에 가장 큰 본성을 완성했고, 숙종 때에는 각종 시설물을 세웠으며, 병자호란 이후에는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해 여러 차례 증개축을 실시한 결과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07년경에는 일본군에 의해 다수의 건축물이 훼손되고 유실되기도 하였으나 1963년 1월21일 경기도에서 남한산성을 사적 제57호로 지정하면서 복원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후 1971년 3월17일 경기도립공원 제158호로 지정되고 이어 5년 후인 1976년 7월1일에는 산성을 시찰하는 관리사무소가 개소되었다.
또한 1999년에는 남한산성 역사관이 개장했고, 2007년 6월8일에는 대한민국의 사적 제80호로 지정되었으며, 201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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