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미 기자의 역사이야기] 왕실의 희로애락 투영된 '경희궁' 1
[나은미 기자의 역사이야기] 왕실의 희로애락 투영된 '경희궁' 1
  • 나은미 객원기자
  • 승인 2021.09.29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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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본 영조와 정조의 삶
경희궁 자정전 ⓒ 나은미 객원기자
경희궁 자정전 ⓒ 나은미 객원기자
경희궁 자정문 ⓒ 나은미 객원기자
경희궁 자정문 ⓒ 나은미 객원기자

[휴먼에이드포스트] 조선 5대 궁궐 중 경희궁(慶熙宮)은 1617년 광해군이 조성한 궁궐이다. 이후 인조에서 철종까지 10명의 왕과 비빈이 기거했던 생활공간이다. 특히 숙종과 장희빈의 연애사는 물론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 정조대왕의 암살 계획까지 파란 많은 세월이 이곳에 얽혀있다. 그중 영조와 사도세자의 소통 부재로 비극이 일어난 영화 <사도>와 정조대왕 암살 계획 실패를 그린 영화 <역린>의 현장이 있는 서궐 경희궁을 찾아가 보았다. 
 
영화 <사도>에 그려진 '경희궁'과 영조·사도세자 부자 
조선왕실이 사랑하고 애착을 가졌던 '경희궁(慶熙宮)'에서는 10명의 왕과 비빈들이 생활했다. 그중 가장 달달한 사랑과 쌉싸름한 애증을 남긴 왕은 제19대 숙종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영조와 증손자 정조는 권력과 암투 앞에 지존과 자존을 곧추세운 왕으로 족적을 남긴다. 특히 영조는 경희궁에 가장 오래 머물면서 아들인 이선(사도세자, 추존왕 장조)과 갈등을 빚다가 결국 뒤주에 가둬 죽인 야멸찬 부성(父性)으로 기록된다. 반면 손자 이산(정조)의 총명함으로 인생의 기쁨을 누린 영조의 빛나는 한 순간도 여기에 있다.  

영화 <사도>는 1762년 7월4일, 영조에게 영빈이씨(선희궁, 영조의 후궁, 사도세자 생모)가 찾아와 세자의 역모를 고변하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이에 진노한 영조는 왕의 수레인 연을 타고 경화문을 통과한다. 영조가 경희궁을 나서서 창덕궁의 선원전으로 들어갈 때 좋은 일을 앞두고는 만안문으로, 흉한 일을 앞두고는 경화문으로 출입하는 습관을 알고 있던 혜경궁 홍씨가 궁녀에게 묻는다.   
이날 영조는 창덕궁의 선원전에서 참배하고 나온 후 창경궁의 문정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바로 세자를 불러 지난 밤 역모를 추궁하며 맨발로 땅에 엎드리게 한 후 자결을 명했다. 세자가 용서를 빌었지만 영조는 뒤주 속에 가두었다. 그리고 다음날 뒤주를 창경궁 선인문 안뜰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거기에 풀과 두엄을 덮어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해 8일 후 세자는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이 영화 <사도>의 시작과 끝은 경희궁 '존현각(尊賢閣)'이다. 세손인 이산은 평소 독서삼매경을 즐기는 습관이 있다. 이곳 존현각 앞에서 영조와 세손 이산의 대화를 들은 세자 이선은 번뜩이는 칼날을 내려놓고 광란과 바람을 멈추었다. 왜 그랬을까? 

"지난번에 네 아비가 영빈의 회갑연을 치러줬다지?"라고 영조가 묻는다. 이에 "그러하옵니다" 세손 이산(정조)이 대답한다. "그때 너도 4배를 올렸다지? 네 할미는 일개 후궁인데, 어찌하여 왕과 왕비에게만 올리는 4배를 올렸단 말이냐? 그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 아니더냐? 세손은 대답해보라."
"소손은 할바마마가 왕이 아니어도 백배, 천배를 올릴 수 있사옵니다. 사람이 있고 예법이 있는 것이지, 어떻게 예법이 있고 사람이 있겠습니까? 공자께서도 예법의 말단을 보지 말고 그 마음을 보라 하였습니다. 그날 소손은 제 아비의 마음을 보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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